[응답하라 1990년대] 유학 후 다른 스타일의 ‘싱어송라이터’로 변신

[양형석 기자]

스포츠에 우수한 선수들이 특정한 해에 쏟아져 나오는 ‘황금 세대’가 존재하듯 아마추어 가수 지망생들의 실력을 뽐내는 가요제나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재능 있는 인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해가 있다. 1977년부터 2012년까지 36회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던 ‘MBC대학가요제’에서는 1978년에 열린 2회 대회 때 유독 뛰어난 뮤지션들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워사다리

금상을 받은 노사연을 비롯해 송골매 멤버들이 주축이 된 활주로(은상),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전설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심수봉 등이 1978년 대학가요제 출신이다. 활주로 멤버였던 배철수의 증언(?)에 의하면 2회 대회에서 우수한 팀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1회 대학가요제 대상곡이었던 샌드페플즈의 <나 어떡해>를 듣고 각 학교의 음악동아리에서 “뭐야, 저 정도는 우리도 하겠네”라며 2회 대회에 대거 참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의 축제였던 강변가요제에서는 단연 1988년이 ‘황금세대’라 불릴 만하다. 솔로 데뷔 후 <한 번만 더>로 인기를 얻었던 고 박성신은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가창상과 장려상을 받았고 이승철의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신승훈의 <우연히> 등을 만든 작곡가 박광현도 1988년 강변가요제 은상 출신이다.알 없는 안경을 최초로 유행시킨 이상우는 <슬픈 그림 같은 사랑>으로 금상을 받고 <바람에 옷깃이 날리 듯>, <그녀를 만나는 곳 100M전>, <하룻 밤의 꿈>, <비창> 등 많은 히트곡을 부르며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토록 쟁쟁한 1988년 강변가요제 멤버들도 대상 수상자만큼의 명성은 얻지 못했다. 바로 1980년대 최고의 여성 아이돌이자 가요계를 대표하는 ‘자유로운 영혼’ 이상은이다. 

▲  1989년 12월 발매된 2집은 ‘아이돌 스타’로서 이상은이 내놓은 마지막 앨범이었다.
ⓒ 지구레코드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 후 ‘마이클 잭슨’을 외친 당돌한 톰보이

무남독녀 외동딸인 이상은은 어린 시절부터 건축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미술, 문예, 연극 등 예체능 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미대 진학을 원했던 이상은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학원비를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변경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이상은은 1학년 여름방학이던 1988년 8월 춘천 남이섬에서 열린 제9회 MBC강변가요제에 출전해 학교 선배가 써준 <담다디>를 불러 대상을 차지했다. 이상은은 대상 수상 후 “지금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MC 이수만의 질문에 당당하게 “마이클 잭슨”이라고 외쳐 전국을 충격에 빠트렸다(그런 상황에서는 십중팔구 부모님이나 스승님을 찾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강변가요제가 끝난 후 이상은이 몰고 온 ‘담다디 열풍’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담’이라는 단순한 후렴구가 반복되는 중독성 있는 가사와 쉽고 경쾌한 멜로디, 그리고 이상은의 자유로운 무대매너는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돌 가수’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절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 아이돌이 바로 이상은이었던 셈이다(특히 이상은은 특유의 중성적인 매력 때문에 남성팬보다 여성팬이 더 많기로 유명했다).

이상은은 정식으로 데뷔 앨범을 발표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담다디>로 KBS <가요톱텐>에서 무려 4번이나 정상을 차지했고 이상은이 주연한 <담다디>라는 제목의 영화까지 제작됐다. 이상은은 <가요톱텐>같은 순위프로그램이 없던 MBC에서도 연말 < 10대 가수 가요제 >의 신인상과 10대 가수상을 휩쓸며 폭발적인 인기를 증명했다.

어린 나이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만19세의 어린 학생이었던 이상은에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관심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상은을 대스타로 만든 경쾌한 댄스곡 <담다디>는 애초에 이상은이 원하는 스타일의 음악도 아니었다. 결국 이상은은 1989년 1월, 대중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1집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다.

훗날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유명해지는 포크 가수 강인원이 프로듀싱을 맡은 이상은의 1집 앨범은 < Happy Birthday to you >, <사랑해 사랑해>, <내 인생을 위하여>, <슬픔 없는 이별> 등 느린 템포의 발라드 위주로 채워져 있다. 하나같이 이상은의 허스키한 보이스를 극대화한 명곡들이었지만 대중들이 기대했던 것은 ‘발라드 가수’ 이상은이 아니었다. 결국 이상은 1집은 높았던 기대치에 비해 다소 실망스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렇게 이상은은 ‘하고 싶은 음악’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고 고민 끝에 절충안을 찾아냈다. 그리고 1980년대가 저물어가던 1989년 12월 대중들의 기호와 자신의 음악적 욕심을 반씩 채운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물론 이상은은 앨범을 준비해야 할 비활동 기간에도 캐롤음반을 내고 영화 <굿모닝 대통령>에 출연하는 등 부지런히 ‘혹사’ 당했다).

대중의 기호와 음악적 욕심 사이에서 찾아낸 절충안

이상은은 1집에서 실망한 대중들을 달래기라도 하듯 시종일관 사랑하게 될 거라고 외치는 단순한 가사와 경쾌한 리듬이 돋보이는 댄스곡 <사랑할거야>를 2집 타이틀곡으로 선택했다. <담다디>의 이미지를 다시 앞세워 인기몰이를 해보겠다는 소속사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곡이었다. <사랑할거야>는 <가요톱텐> 1위 후보까지 오르며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훗날 일본곡을 표절한 것으로 판명됐다(물론 이상은이 쓴 곡은 아니다).

이상은은 후속곡 <그대 떠난 후>에서도 비슷한 이미지의 중성적인 매력을 뽐냈다. 사실 <담다디>의 연장선에 있던(게다가 표절곡이었던) <사랑할거야>보다는 ‘<그대 떠난 후>를 타이틀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스탠딩 마이크에 선글라스를 끼고 ‘걸크러시’를 내뿜는 무대연출을 할 수 있는 솔로 여가수는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은은 2집 앨범을 통해 1집에서 아쉬움을 남겼던 발라드 음악들을 다시 시도했다. 1집의 프로듀서 강인원이 만든 <눈 뜨면 사랑이에요>와 <언아그듣(언제나 아침이면 그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이 대표적이다. 특히 <언아그듣>은 세련된 멜로디와 슬픈 가사, 그리고 한층 노련해진 이상은의 보컬이 조화를 이룬 명곡이다. 

앨범 후미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는 <야간비행>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5분 4초짜리 대곡이다. ‘태양이 스스로 떠오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아’라는 도발적인 가사에 노래의 속도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실험적인 형식의 곡이다. 비록 이상은이 직접 가사를 쓰진 않았지만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가사 내용은 마치 그 시절 이상은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 앨범에서 결코 쉽게 듣고 넘겨선 안 될 곡이 바로 이상은 최초의 자작곡 <아오아오아>다. 발매 당시엔 가사 내용처럼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신부가 혼자 숨어 우는 장면을 상상해 곡을 썼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스타 시스템’에 의해 조종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담은 곡이다. 생각 없이 들으면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시 이상은이 처한 상황을 알고 나면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지는 곡이다.

비록 데뷔할 때만큼의 신드롬엔 미치지 못했지만 이상은은 여전히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아이돌 가수였다. 하지만 이상은은 원치 않는 음악을 하면서 소비되는 현실에 큰 자괴감을 느꼈다. 결국 이상은은 1990년 늦가을, 라디오DJ를 비롯한 모든 방송 출연을 중단(심지어 학교까지 휴학)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 어느 여름날 갑자기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던 ’80년대 아이돌’은 그렇게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절정의 인기를 버리고 홀연히 떠난 자유로운 보헤미안

당초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이상은은 다시 음악에 대한 열정이 타올라 음악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상은은 1991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만든 3집 <더딘 하루>를 발표하며 여성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어쿠스틱 음반인 5집 <언젠가는>을 발표하며 인기스타가 아닌 여성 뮤지션으로 인정 받았다.

이상은은 5집 발매와 동시에 미국 학교를 휴학하고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한국 연예계의 부조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이상은은 <언젠가는> 활동 후 한국 활동에 환멸을 느껴 주류 연예계로 눈길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유학을 마친 이상은은 본격적으로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다. 1995년에는 대중성이라고는 귀를 씻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6집 <공무도하가>를 발표해 대중들을 패닉에 빠트렸다. 비록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상은 6집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10위에 오르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참고로 대중음악 100대 명반 베스트 10에 이름을 올린 여성 뮤지션은 이상은이 유일하다).이후 이상은은 <외롭고 웃긴 가게>, <비밀의 화원>, <삶은 여행> 등 ‘아는 사람만 아는 노래’들을 발표하며 자유롭게 음악 활동을 이어 갔다. 이상은은 지난 9월에도 ‘남도애가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싱글 <쉬어가리>를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더 이상 대중들에게 익숙한 가수는 아니지만 이상은이 직접 쓴 <그대 떠난 후>의 노랫말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사라진 건 아니다.

▲  이상은은 2014년에 발표한 lulu 앨범까지 무려 15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했다.
ⓒ Sony Music
홍진영
홍진영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가수 홍진영이 논문 표절 의혹에 휩싸였다. 홍진영 측은 이를 ‘관례’라고 해명하고 나섰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의혹이 아직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홍진영은 자숙 보다는 방송과 신곡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의혹에 휩싸인 여느 연예인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홀짝게임

사건의 발단은 지난 5일 한 매체가 홍진영이 지난 2009년 조선대학교 대학원 무역학과 석사 논문으로 제출한 ‘한류를 통한 문화콘텐츠 산업 동향에 관한 연구’가 표절 심의 사이트 ‘카피킬러’ 검사 결과 표절률 74%를 기록했다고 보도하면서 시작됐다.

보도에 따르면 홍진영이 제출한 석사 논문의 전체 문장 556개 중 6개 어절이 다른 논문과 일치, 동일 문장은 124개, 표절로 의심되는 문장은 365개에 달했다, 홍진영은 해당 논문으로 조선대학교 무역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3년 후인 2012년에는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보도되자 즉각 논란이 됐다. 이에 홍진영의 소속사 IMH엔터테인먼트는 표절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며 특정 논문의 인용률이 높은 건 당시 추세였다는 이해하기 힘든 설명을 늘어놓았다. 많은 인용이 있어야 논문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는 것.

홍진영 측의 해명은 즉각 누리꾼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학사와는 달리 전공 과의 심도 있는 전문 지식을 검증하는 석사와 박사 논문의 경우 여러 자료들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평균 인용률이 20% 안팎에 불과하다.

표절 시비를 다투는 부분을 마치 당시 관례라고 해명하는 부분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마치 홍진영과 같은 시기에 석사 박사 논문을 준비했던 사람들의 노력을 매도하는 듯한 뉘앙스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더 논란이 된 건 조선대학교는 홍진영의 부친이 조선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였다는 점이다. 높은 표절률에도 석사, 박사 논문이 통과할 수 있었던 건 해당 대학 교수였던 부친의 입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냐는 누리꾼들의 의심이 마냥 근거 없는 말이라고 볼 수 없다.

파워볼
논란이 계속되자 홍진영은 6일 자신의 SNS에 학위를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당 글을 통해 홍진영은 “당시 관례로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단지 몇%라는 수치로 판가름되니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변명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 답답하고 속상할 뿐”이라며 “전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반납하겠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같다. 이 모든 게 다 저의 불찰이고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높은 표절률은 당시 관례를 따랐을 뿐이라는 홍진영의 사과문에 누리꾼들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모양새를 보였다. 급기야 시민단체에서 지난 8일 교육부를 상대로 감사청구서를 제출하면서 논문 표절 의혹은 홍진영에서 조선대학교 전체로 번지게 됐다.

이에 조선대학교 측은 9일 티브이데일리에 “오전에 긴급회의를 마치고, 오후 3시부터 홍진영 씨 학위 취소 방안과 관련한 회의를 한 차례 더 진행 중이다”라며 “이번 회의를 통해 논문 심사 위원회를 소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논문 심사 위원회를 꾸린 뒤 정확한 진상을 파악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논문 표절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와중에도 홍진영은 신곡 음악방송 무대와 SBS ‘미운 우리 새끼’ 출연을 감행해 논란을 더했다. 나아가 홍진영 소속사는 홍보대행사를 통해 9일 홍진영의 신곡 음악방송 첫 주 활동 성료 홍보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아직 표절 논란이 무엇하나 명확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마이웨이’ 홍보에 누리꾼들의 반감만 커진 상황이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DB]

故 송재호, 유가족·교인들 배웅 속 영면
반세기 동안 연기해온 ‘국민 배우’

[이데일리 스타in 김가영 기자] 故 송재호가 가족들의 슬픔 속 세상과 작별했다.

[이데일리 스타in 이영훈 기자] 지난 7일 향년 83세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 故 송재호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1937년 북한 평양 출신 故 송재호는 동아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다. 이후 1964년 충무로를 찾아 영화 ‘학사주점’으로 배우로 전향했다. 1968년에는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드라마 ‘보통사람들’, ‘열풍’, ‘부모님 전상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세 번의 짧게 세 번은 길게‘ 등이 있다. 또 ’연평해전‘, ’자전차왕 엄복동‘, 진투의 역사’ 드라마 ‘싸인’, ‘추적자’ 등에 출연하면서 꾸준히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송재호의 발인식이 10일 오전 7시 45분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발인식에 앞서 오전 7시 15분 엄수된 영결식은 고인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만큼 기독교식 예배로 진행됐다.

고인이 다녔던 오륜교회의 김은호 목사가 집례한 영결식에는 유가족, 고인과 가깝게 지냈던 교인들이 참석해 기도와 찬송가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유가족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송재호는 지난 7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이데일리 단독 보도) 향년 83세. 고인은 반세기 동안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국민배우’다. 1959년 부산 KBS에서 성우로 데뷔한 후 1964년 영화 ‘학사주점’을 계기로 연기자로 전향, 1968년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돼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이데일리 스타in 이영훈 기자] 지난 7일 향년 83세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 故 송재호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1937년 북한 평양 출신 故 송재호는 동아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다. 이후 1964년 충무로를 찾아 영화 ‘학사주점’으로 배우로 전향했다. 1968년에는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드라마 ‘보통사람들’, ‘열풍’, ‘부모님 전상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세 번의 짧게 세 번은 길게‘ 등이 있다. 또 ’연평해전‘, ’자전차왕 엄복동‘, 진투의 역사’ 드라마 ‘싸인’, ‘추적자’ 등에 출연하면서 꾸준히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배우 생활을 시작하며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 ‘창수의 전성시대’(1975), ‘과거는 왜 물어’(1976), ‘깃발 없는 기수’(1980), ‘살인의 추억’(2003), ‘화려한 휴가’(2007), ‘해운대’(2009), ‘길’(2017), 드라마 ‘113 수사본부’(1973), ‘눈동자’(1981), ‘보통사람들’(1982), ‘사랑이 꽃피는 나무’(1987), ‘용의 눈물’(1996), ‘왕과 비’(1998), ‘명성황후’(2001), ‘장희빈’(2002), ‘부모님 전상서’(2004), ‘싸인’(2011), ‘동네의 영웅’(2016)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지난해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질투의 역사’ 등에 출연하며 여전한 연기 열정을 보여줬다.

연기 활동 뿐만 아니라 1979년 서울용호구락부 소속 사격연맹에 선수로 등록됐고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을 보유해 1986년 ‘아시안게임’ 사격종목 국제 심판, 1988년 ‘서울 올림픽’ 사격종목 보조심판을 맡으며 이색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99하남국제환경박람회조직위원회 홍보위원’, ‘문화재사랑’ 어린이 창작동요제 홍보대사,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 ‘제4대 야생생물관리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연기 외 다양한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이데일리 스타in 이영훈 기자] 지난 7일 향년 83세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 故 송재호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1937년 북한 평양 출신 故 송재호는 동아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다. 이후 1964년 충무로를 찾아 영화 ‘학사주점’으로 배우로 전향했다. 1968년에는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드라마 ‘보통사람들’, ‘열풍’, ‘부모님 전상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세 번의 짧게 세 번은 길게‘ 등이 있다. 또 ’연평해전‘, ’자전차왕 엄복동‘, 진투의 역사’ 드라마 ‘싸인’, ‘추적자’ 등에 출연하면서 꾸준히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고인이 생전 선한 영향력을 펼쳐온 만큼 연예계 뿐만 아니라 각계에서 고인을 추모했다. 홀트아동복지회에서는 “오랜 기간 함께 해주신 송재호 홍보대사께서 소천하셨다”며 홀트아동복지회 전 직원은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동들과 이웃들을 위해 함께 힘써주신 송재호 홍보대사님의 안타까운 소식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며 추모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원로배우 송재호 선생님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인께서는 평생을 연기에 전념하며, 반세기 넘는 세월을 대중과 호흡한 ‘국민 배우’셨다 ”며 “2012년에는 밀린 출연료 지급을 촉구하는 촬영 거부 투쟁을 벌이며 ‘나는 생계 걱정을 안 하지만 이 돈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는 후배 연기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참 따뜻한 배우셨다. 많이 그리울 것”이라고 추모했고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제가 초선 국회의원일 때 고인을 뵈었다. 참 온화하고 멋진 분이셨다. 강한 애국심과 긍정적인 인생관도 강조하셨다”며 “후배들의 귀감이셨다. 편히 쉬시라”고 애도했다.

김가영 (kky1209@edaily.co.kr)

박성광이 치매를 걱정하는 부친의 우울증 진단에 눈물을 쏟았다.

11월 9일 방송된 SBS ‘동상이몽 시즌2-너는 내 운명’에서 박성광 이솔이 부부는 박성광 부친 치매검사를 받으러 갔다.

이날 방송에서는 박성광 이솔이의 신혼집으로 박성광 부모님이 찾아왔다. 박성광 부친은 요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치매를 의심했다. 박성광 이솔이 부부는 걱정하며 함께 병원을 찾아가 박성광 부친의 치매검사를 받았다.

박성광 부친은 의사에게 건망증을 털어놓으며 “화장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적이 있다. 의식을 잃어서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다. 2시간 정도. 응급실까지 갔었다”고 말했다. 박성광 모친은 이후로 남편의 성격이 “더 괴팍해졌다”고 말했다.

의사는 “85세에서 90세면 몰라도 68세에 내가 처지가 못하다고 느끼는 건 차이가 크다. 옛날에 비해 사는 게 만족스럽지 못하냐. 의욕은 어떠냐. 평소 기분은 어떠냐. 앞으로 희망이 있냐”고 질문을 계속 하다가 “우울증이 있나 물어본 거다”고 말했다. 박성광 모친은 “그런 건 없는 것 같다”고 답했지만 의사는 “약간 있다”고 말했다.

박성광은 부친의 대답을 들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급기야 박성광은 화장실에 가서 홀로 눈물을 쏟았고 따라온 아내 이솔이에게 “아빠한테 미안해서”라고 말했다. 박성광은 “아빠를 너무 몰랐다”고 자책했다.

이어 검사 결과 의사는 “뇌기능이 20-30% 떨어져 있다”며 사고 후유증 같다고 말했다. 뇌손상 후유증으로 인해 정서 변화도 올 수 있다고. 의사는 “뇌 손상된 부분도 있지만 좀 우울증이 있다. 심한 게 아닌데 누워서 TV만 보면 그게 제일 안 좋은 거다. TV 만드는 사람은 몸을 움직여 건강한데 보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린다”고 말했다.

의사는 “전반적으로 보기에 치매는 아니다. 뇌손상에 따른 경도 인지장애다. 그리고 약간의 우울증이 있는 걸로. 약물치료 겸하면 점차 호전이 될 거 같다”며 “그런데 앞으로 지금처럼 생활하면 4-5년 내에 치매로 발전한다. 지금 상태에서는 치매로 가는 입구에 있다. 근처에 있다. 관리를 잘하면 10년 이상 편하게 즐겁게 지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성광은 “아버지가 사회활동 안하고 집에만 있으니까 많이 무기력하고 삶의 낙이 없다고 하시는 거다. 유일하게 기쁠 때가 광복이(반려견)와 같이 있을 때만 웃으신다고 하더라. 광복이 역할을 제가 했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기타 치시는 데 관객이 광복이였다. 광복이에게 고맙고. 그 역할을 제가 해야 하지 않나”라고 반성했다.

이후 박성광 부친은 기타를 연주하며 취미생활을 했고 이번에는 가족들이 관객이 됐다. 박성광 부친은 며느리 이솔이가 선물한 장발 가발을 멋지게 쓰고 기타를 연주해 감탄을 자아냈다. 또 아들 박성광에게 사랑과 미안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적어 가족들과 지켜보던 MC들까지 울리며 감동을 선사했다. (사진=SBS ‘동상이몽2 너는 내 운명’ 캡처)

[뉴스엔 유경상 기자]뉴스엔 유경상 y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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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세시봉' 멤버 윤형주는 물류단지 개발사업과 관련해 사업가 강모 씨로부터 차용 또는 투자금 명목으로 빌려간 뒤 갚지 않은 혐의에 대해 특가법 사기혐의로 지난달 27일 피소됐다. /그래픽=정용무 기자
‘원조 세시봉’ 멤버 윤형주는 물류단지 개발사업과 관련해 사업가 강모 씨로부터 차용 또는 투자금 명목으로 빌려간 뒤 갚지 않은 혐의에 대해 특가법 사기혐의로 지난달 27일 피소됐다. /그래픽=정용무 기자

사업가 강 모 씨, “개인 채무 변제 의도된 사기” 검찰 고소

[더팩트|강일홍 기자] 가수 윤형주(73)가 사기사건 혐의로 또 피소됐다. 물류단지 조성 및 개발사업과 관련해 사업가 강 모 씨로부터 차용 또는 투자금 명목으로 빌려간 20억 원을 갚지 않은 혐의다. 3년 전에도 그는 ‘횡령 배임’ 혐의에 연루돼 이슈의 중심에 선 바 있다.

10일 <더팩트> 취재 결과 이 고소 건(2020형 제91***)은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 ‘특가법'(사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접수됐다. 이달 3일 관할서로 배당(수사지휘) 돼 현재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윤형주를 고소한 강 모 씨는 지난 8일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유명 연예인으로 정재계의 영향력과 재력, 인맥을 과시해 투자를 하게 했다”면서 “그런데 정작 이렇게 받은 돈을 투자금 목적에 쓰지 않고 대부분은 개인 빚을 갚거나 다른 용도로 이용하면서 투자금을 상환하지 않아 고소를 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고소장에 따르면 윤형주는 강 씨로부터 2011년 1월 1억 원 차용(후에 투자금 전환), 7월 4일 5억 원, 7월 15일 14억 원 등 총 20억 원을 빌렸다. 강씨는 윤형주와 투자계약서(안성보개물류단지)를 작성해 원금(20억)과 수익금(20억)에 대한 구체적 상환 일정 등을 약정했다.

사업가 강 모 씨가 윤형주를 상대로 제기한 고소장은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 '특가법'(사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위반 혐의로 접수됐다. 이달 3일 관할서로 배당(수사지휘) 돼 현재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사업가 강 씨 측 제공
사업가 강 모 씨가 윤형주를 상대로 제기한 고소장은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 ‘특가법'(사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위반 혐의로 접수됐다. 이달 3일 관할서로 배당(수사지휘) 돼 현재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사업가 강 씨 측 제공

윤형주는 물류단지개발사업 시행사인 ㈜B사 대표이사로, 투자자 강 씨와 맺은 약정서에는 ‘토지매입 계약금’ ‘설계 용역비’ 등 당시 B사가 진행 중인 해당사업에만 집행할 수 있도록 투자금 사용 범위를 제한하는 규정을 뒀다.

또 강 씨의 투자 결정에 앞서 윤형주 측은 ‘대표이사 차입 후 증자 및 1년 후 투자 원금(20억) 상환과 상환 후 6개월내 10억원, 1년 내 10억원 등 투자수익금 20억원 지급, ㈜B사 연대보증’ 등을 골자로 한 B사 이사회 결의와 함께 윤형주의 B사 지분 중 40만주(액면가 20억원)의 담보제공 확약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1년 뒤 윤형주와 B사가 약정한 지급기일을 넘기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투자자 강 씨는 “제 투자금이 윤형주 씨 통장에 입금된 이후 개인 채무 또는 B사의 다른 사업용도로 90% 넘게 무단 사용된 걸로 봐서 애초부터 약속했던 사업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윤형주는 <더팩트>에 “안성물류사업은 그동안 자금 문제로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한번도 중단된 일이 없다. 우여곡절을 거친 뒤 최근 빛을 보기 시작했고 제가 개발한 단지 앞으로 세종고속도로 동안성IC가 나오게 전망이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와 전화통화 후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는 “강 사장(고소인)은 사업초기 어려울 때 제게 많은 도움을 준 고마운 분인데 약속한 채무 변제가 늦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늘 미안한 마음”이라면서 “얼마 전 회사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면서 변제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걸 매각으로 오해해 고소를 진행한다면 필요없는 소모전이 될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사업가 강씨는 "제가 투자한 돈을 사업 목적에 쓰지 않고 대부분은 개인 빚을 갚거나 다른 용도로 이용했다"며 고소 배경을 설명했다.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사업가 강씨는 “제가 투자한 돈을 사업 목적에 쓰지 않고 대부분은 개인 빚을 갚거나 다른 용도로 이용했다”며 고소 배경을 설명했다.

강 씨가 B사 내부 직원을 통해 확인한 윤형주의 개인 채무 변제 및 B사의 별도 사업 집행 내역은 총 24건 18억 6000여만 원에 달했다. 이 때문에 유명인의 이름값으로 사업투자금을 유치해 개인용도로 쓴 것은 명백한 사기라는 입장이다. 이후 강 씨는 윤형주의 방송출연료와 음원 저작료 등에 가압류 및 경매과정을 거쳐 일부를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씨는 “수 차례 약속을 어겨 긴 법적 다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정신적 경제적 피해가 너무 크다. 그동안 저 외에도 윤형주 씨에게 돈을 빌려준 수많은 다른 채권자들을 만났다. 제 경우처럼 대부분 자발적 채무 이행을 하지 않아 고통을 받고 있다. 이제라도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투자 1년 뒤부터 계속 말을 바꾸고 채무 이행을 미루는 걸 보고 편취 의도를 간파했다”면서 “3년 전 B사 전 대표였던 한모씨가 그를 배임 횡령혐의로 고소할 당시에도 법적인 단죄보다는 채권 회수가 먼저라는 생각에 미뤄둔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윤형주는 “살고 있는 집을 경매하고 유체동산 처분 등의 과정으로 저도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저로 인해 장기간 고통을 받고 있는 그분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채무변제의 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작권료, 음반사업협회, 음악실연자협회의 수익금 ,방송출연료 등으로 투자금 20억원 중 지금까지 11억 3천만 원가량을 변제했다”고 설명했다.

강씨의 형사고소 외에도 윤형주는 지난 8월 또다른 사업가 주모 씨에 의해서도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취재결과 (주)B사 자기지분 주식을 제3자인 (주)L사에 양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더팩트 DB
강씨의 형사고소 외에도 윤형주는 지난 8월 또다른 사업가 주모 씨에 의해서도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취재결과 (주)B사 자기지분 주식을 제3자인 (주)L사에 양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더팩트 DB

강 씨가 언급한 B사 전 대표 한 씨는 2018년 사업가 A씨와 함께 42억 원대의 회사 자금을 횡령 또는 배임했다며 윤형주를 고소했다. 윤형주 외에 윤형주 친동생 윤 모씨(B사 대표이사), 아내 김 모씨(감사), 사내이사 문 모씨 등이 포함됐다.

당시 사건을 수사한 서울 수서경찰서는 한 씨 등이 함께 제기한 사문서위조 및 행사, 자격모용 사문서 작성 및 행사, 공정증서 불실기재 등 ‘대표이사 해임과 공증 건’과 관련한 사안에 대해서는 전원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횡령과 배임 건에 대해서는 윤형주에게 ‘일부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이 사건은 검찰 일부 무혐의-항고-재판과정을 거처 최종 무혐의 처리됐다. 이 부분에 대해 윤형주는 “회사 자금은 모두 이사회 결의에 따라 집행했기 때문에 횡령이나 배임이 성립되지 않는 사항이었다”면서 “당시 해외 봉사활동 중이어서 해명할 기회도 없이 기사화되는 바람에 굉장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윤형주는 강씨의 형사고소 외에도 지난 8월 또다른 사업가 주모 씨에 의해서도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사진은 2011년 물류단지 관련 투자 당시 쓴 투자계약서(왼쪽)와 이사회결의 사본. /고소인 강씨 측 제공
윤형주는 강씨의 형사고소 외에도 지난 8월 또다른 사업가 주모 씨에 의해서도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사진은 2011년 물류단지 관련 투자 당시 쓴 투자계약서(왼쪽)와 이사회결의 사본. /고소인 강씨 측 제공

강 씨의 형사고소 외에도 윤형주는 지난 8월 또다른 여성 사업가 J씨에 의해서도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J씨는 윤형주로부터 B사의 사업권을 일부 양도받아 토지매입 및 용역비 등을 지불한 뒤 주식을 양도받기로 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 결과 윤형주는 법적 다툼의 원인이 된 ㈜B사 자기지분(아내 김모씨 지분 포함) 주식을 제3자인 ㈜L사에 양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 씨는 “그동안 수없이 신뢰를 져버린 그가 저와 어떤 사전협의도 없이 채권 담보가 돼 있는 주식자산(96%)을 몰래 제3자에게 넘기는 행위는 더이상 빚을 갚을 의사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형주는 문자를 통해 “강 사장에 대한 채무이행은 L사가 인수한 B사 새 경영진의 채무변제 1순위로 정해져 있고 이것이 제가 계약 전 요구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기에 이들이 당연히 강 사장에게 연락해서 변제 계획에 대해 협의한 줄 알았다”고 답변했다. 확인 결과 이 부분(채무변제 1순위 약정)은 사실과 달랐다.

윤형주 측이 강씨를 상대로 제기한 청구이의 청구소장(맨 왼쪽)과 강씨가 윤형주를 상대로 낸 주식 가압류 법원 결정문(가운데), 윤형주가 2012년 강씨에게 쓴 약속어음사본(맨 오른쪽). /고소인 강씨 측 제공
윤형주 측이 강씨를 상대로 제기한 청구이의 청구소장(맨 왼쪽)과 강씨가 윤형주를 상대로 낸 주식 가압류 법원 결정문(가운데), 윤형주가 2012년 강씨에게 쓴 약속어음사본(맨 오른쪽). /고소인 강씨 측 제공

윤형주의 설명과 달리 L사 측은 오히려 채권자인 강 씨에 대해 정반대의 조치를 취한다. 주식을 양도받은 새로운 경영진은 강 씨에 대한 채권 소멸시효 완성 및 변제(개인채무 일부 변제-B사 채무 시효만료)를 이유로 지난 10월12일 ‘채무불이행자명부등재 신청’ 무효를 주장하는 청구이의 소송(2020가 합580***)을 제기한 상태다.

강 씨를 상대로 법원에 낸 ‘청구이의’ 소송(채무불이행자명부등재 신청 무효주장)은 ‘B사와 연대해 (강씨로부터) 투자받은 20억원 중 (경매 압류 등으로) 개인 변제금이 10억 원을 초과했고, B사는 약속어음 발행 후 피고(강씨)로부터 단 한 차례도 채무 이행에 대한 독촉을 받거나 변제한 적이 없어 어음청구권 소멸시효(3년)가 완성됐으므로 채권은 모두 소멸됐다’는 내용이다.

강 씨는 “시간을 끌다 결국 소멸시효를 주장하며 이런 소송으로 압박한 것은 적반하장”이라며 반발했다. 그는 윤형주와 B사가 더이상 채무이행 의사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했고, 사기혐의로 고소한 배경이기도 하다. 앞서 강 씨는 2017년 1월 윤형주와 B사에 대한 ‘채권 압류 및 추심명령'(2017타 채100***), 지난 8월 B사 지분 ‘주식 압류명령'(2020타 채118***) 등의 법원 결정을 각각 받았다.

'원조 세시봉' 멤버 윤형주는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지난 9월에는 코로나19로 지쳐있는 시민들을 위로하는 작은 음악회를 오랜만에 갖기도 했다. /더팩트 DB
‘원조 세시봉’ 멤버 윤형주는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지난 9월에는 코로나19로 지쳐있는 시민들을 위로하는 작은 음악회를 오랜만에 갖기도 했다. /더팩트 DB

‘원조 세시봉’ 멤버인 윤형주는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 등을 발표하며 포크가수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0시의 다이얼’ ‘톱 툰 쇼’ ‘팝스 투나잇’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 등 라디오 진행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같은 시대를 풍미한 가수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김도향, 방송인 이상벽 등과 절친 또는 친분이 돈독하다.

지난 9월에는 코로나19로 지쳐있는 시민들을 위로하는 작은 음악회를 오랜만에 갖기도 했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하양무학로교회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그는 ‘조개 껍질 묶어’ ‘우리들의 이야기’와 CM송, 6촌 형으로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해 눈길을 끌었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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